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
대한민국의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제도에서 미국식을 따르느냐, 또는 유럽식을 따르느냐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의 모안으로 채택하였던 유진오안은 유럽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규정하고 있었고, 참고안으로 채택하였던 권승렬안은 미국식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은 양자의 타협으로서 채택된 것이 1948년 7월에 제헌 국회를 통과한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제도이다.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는 보통법원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일종이고, 그 구성은 부통령이 위원장이 되고 국회가 선출하는 국회의원 5인의 의원(양원제 국회가 채택된 후에는 민의원 의원 3인과 참의원 의원 2인의 위원)과 대법원에서 선출한 대법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 점에서 유럽식을 따랐지만, 그 심사절차는 미국식을 따랐다. 즉 헌법위원회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권을 가지지만, 독자적으로는 심사를 하지 못하고, 반드시 법원의 제청에 의해서만 심사를 하고, 또 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한하여 당해 사건의 담당판사 또는 소송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판사 3인으로서 구성되는 합의부의 결정에 의하여 헌법위원회에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를 제청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의 위헌결정은 형벌법규를 제외하고는 장래에 향해서만 효력을 발생했는데, 이 점은 유럽 대륙식을 모방했고 미국식과 다르다. 그러나 헌법위원회의 위헌심사 건수는 불과 10건에 미달했고, 더욱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으로 국회의 양원제가 채택되었지만, 자유당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참의원의 선거가 없었는데, 자유당 정권은 이를 빙자하여 헌법위원회의 구성을 지연시켰고, 따라서 헌법위원회의 기능은 1952년 이후 그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한편, 탄핵재판의 결정을 위해 탄핵재판소를 설치하였다. 탄핵재판소의 심판관은 대법관 5인과 참의원의원 5인이었으며, 위원장은 부통령이, 부통령 탄핵의 경우에는 대법원장이 되었다.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
1960년 6월에 실시된 제3차 개헌으로 헌법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헌법 제4호상 상설 헌법기관으로서, 대통령·참의원·대법원이 각각 3인씩 임명하는 심판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여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뿐만 아니라, 정당의 해산, 탄핵재판 등과 같은 여러 정치재판권까지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당 헌법재판소는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구성하지 못하여, 사실상 헌법이 아닌 법률에 있어 헌법재판소는 구성 및 해산된 바 없었다.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
1962년 실시된 제5차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폐지되고 완전히 미국식을 채용하여 위헌심사권을 보통법원에 부여하고 심사절차에 있어서 구체적 규범통제만을 채택하였다. 한편 탄핵재판을 위해서 탄핵심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
당시 대법원의 위헌판단을 위해서는 "대법원 판사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법원조직법 759조의 조항이 있었는데, 1970년 8월 7일 국회에서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대법원의 위헌판단을 위해 "출석판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법을 개정했다. 국회에서는 이 법의 개정이 "위헌 심사를 신중하게 하기 위해"라고 취지를 설명했지만, 사실 이는 징발보상금배상법 등의 입법에 대한 법원의 위헌 판단을 사전에 막기 위한 사전 공작으로 여겨졌다.
결국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에서는 개정된 법원조직법과 국가배상법 등 2개의 법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법원조직법의 경우, 16명의 판사 중 대법원장을 비롯한 5명을 제외한 11명이 찬성함으로써 위헌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또 다른 조항인 국가배상법 2조의 경우, 군인이나 군속 등이 타인의 과실로 인해 전사, 순직 등을 한 경우 일시금이나 유족연금 이외에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으나, 이 결정으로 인해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 이후에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당시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소위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카테고리 없음